- 강경화 장관의 사과 거부에 부쳐
2017년 12월, 주뉴질랜드대사관 현지 직원은 한국인 외교관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특정 부위에 동의 없는 신체 접촉이 발생했음을 인정했지만, 가해자는 그저 ‘성추행 의도가 아니라 장난이었다.’라는 황당한 입장을 밝혔다. 동의 없는 신체 접촉에 피해자가 불쾌감을 느꼈다면, 이는 가해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되어야만 한다.
외교부는 공관 내 성폭력 사건이 감지된 즉시 책임있게 진상조사에 임해야 했고, 뉴질랜드 경찰의 수사에 협조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외교부는 오히려 가해자를 조직적으로 해외로 빼돌렸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책임을 회피하기에 바빴다. 외교부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고발 이후 두 달 만에 가해자를 귀국시켰고, 그 직후에 개최된 졸속 징계위원회를 통해 감봉 1개월이라는 불합리한 수위의 징계만을 내렸다. 또한 가해자를 필리핀총영사로 발령하여 해외로 도피시키기까지 했다.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합법’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국제적 망신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 외교부는 끊임없이 ‘공관의 불가침성과 면책특권은 우리나라의 주권’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뉴질랜드 경찰의 수사에 협조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한국 외교부는 ‘면책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으나 거절당했다.’며 변명했지만, 조직적으로 가해자를 빼돌린 한국 외교부가 핵심적인 증거들을 빼놓지 않고 제출하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실제로 한국 외교부는 사건의 핵심 증거일 수밖에 없는 대사관 CCTV 등에 대한 수사 협조 요청을 거절했다. 한국 정부가 계속해서 면책 특권을 방패로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뉴질랜드 경찰의 제대로 된 수사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면책특권은 말 그대로 권리이므로, 특정 사안에 관하여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 있다. 한국 외교부는 정말로 제대로 된 절차를 통해 사실 여부를 판단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해당 사안에 대하여 면책 특권을 포기하고 수사에 성실하게 응해야만 한다.
이렇듯 고개 숙여 사과해도 모자랄 상황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5일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피해자와 뉴질랜드 국민들에 사과하라는 여당 의원의 요구를 거부했다. “피해자의 말이 다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외교부 장관이 다른 나라에 사과하는 것은 국격의 문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한국 외교부는 이미 해당 사건을 조사했고, 비록 불합리한 수위였지만 그 결과로 가해자에게 징계를 내렸다. 또한 이와 별개로 한국 외교부는 뉴질랜드 경찰의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고, 순식간에 가해자를 해외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사건 수사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당사자가, 사과는 사실 판단 이후의 문제라며 선을 긋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런데도 심지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양국 정상간 통화에서 뉴질랜드 총리가 해당 사건을 언급한 것에 대해, “의제가 되지 않아야 할 게 의제가 된 데 대해서는 뉴질랜드의 책임이 크다.”며 오히려 책임을 떠넘겼다. 외교적 결례는 뉴질랜드가 아닌 한국이 저질렀다. 대체 어떤 피해국이 가해국에게 책임을 묻는 데에 미리 합의를 하나? 외교부는 짜고 치는 대국민 사기극을 바랐던 것인가?
강경화 장관의 언론 플레이와는 다르게, 대사관 성폭력 사건은 반드시 의제가 되어야만 했을 사건이었다. 실제로 3년간이나 사건에 대해 쉬쉬하던 한국 정부는 뉴질랜드 총리의 사건 언급 이후에서야 부랴부랴 가해자를 귀국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한 나라의 장관이 내놓은 입장이 사과 거부와 교묘한 말장난 변명이라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핵심 증거일 수밖에 없는 대사관 CCTV 영상조차 내주지 않으면서, 면책 특권을 포기하지 않은 채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모순된 입장은 피해자와 양국 국민들에 대한 기만이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은 책임 있는 사과가 아니라, 교묘한 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을 축소·은폐 시키려는 정부의 모습이다.
대한민국의 국격을 위해, 가해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하기위해, 외교부의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중단을 촉구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하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즉각 피해자와 뉴질랜드 국민들에 공식적으로 사과하라. 하나. 한국 외교부는 주뉴질랜드한국대사관의 면책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경찰 수사에 성실히 임하라. 하나. 문재인 정부는 뉴질랜드와의 합동 수사 등과 같이 책임 있는 해결방안을 제시하라.
2020. 8. 25 세계시민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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